하해 이희섭의 사진

ㆍ작성자	섭
ㆍ작성일	2007-01-26 (금)

ㆍ조회: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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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ltkdrud의 세번째 글 ”
<부산으로 오다>

의무 복무가 끝났다.
우리 4남매의 맞춤한 터울 덕분에 차례로 일이 년씩 할매 손에서 크다가
드디어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
다시 부산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할매와 어떻게 작별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할매는 더없이 쓸쓸한 표정으로 날 떠나보내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해 설핀 저녁을 맞이했겠지.
사람이 든 자리는 잘 표가 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도드라지는 법이라는데
아침저녁으로 말동무도 하고 데리고 육백도 치며
가없는 사랑을 퍼붓던 손자가 빠져나간 자리란 얼마나 휑했을까.
도란도란 마주 앉던 저녁 상머리는 다시금 뼈저린 고독으로 채워졌겠지.
이불을 걷어차며 돌아눕는 나에게 이불을 여며주고
“이 노무 자석, 몸부림을 와 이래 쳐 쌌노, 고뿔들구로.” 중얼대며
궁둥이 툭툭 두드려 주던 밤도 저 혼자 느릿느릿 깊어갔을 것이다.
그 밤에도 부엉이가 울었을까.
나는 지금도 할매가 날 떠나보내던 날 밤의 정경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에인다.

나는 일단 한 30 여리 떨어져 있는 큰집으로 데려다졌다.
아마 며칠 뒤 큰아버지가 부산 나들이를 할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고
그 인편에 내가 따라가야 했었나 보다.
큰집은 식구가 많았고 어울려 놀 수 있는 사촌 형제들도 수두룩했다.
그때는 작은 아버지도 아직 살림을 나지 않아서
온 식구가 둘러앉는 끼니때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는 따로 겸상을 받았고
그 상에나 꽁치자반이며 김 따위의 반찬이 올려 질 뿐,
나머지 식구들은 큼직한 두레상에 모조리 둘러앉았는데
큰 양푼에 보리밥을 수북이 담아 상 가운데 놓고
너나없이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는 것이었다.
반찬도 큰 사발에 가득 담긴 김치와 동치미, 냄비 째 올려놓은 된장이 전부였다.
일찌감치 상 앞에 자리를 잡지 못한 아이들은 멀찍이 뒤편에 앉아
어깨 부비며 앞자리를 차지한 형제들 너머로 분주히 숟가락질을 했다.
그나마도 안 되게 큰엄마와 큰누이는 아예 방바닥에 따로 그릇을 둘 밖에.
조용하던 외갓집과 달리 같이 놀 또래도 많고
오랜만에 왔다고 보비위해 주던 사촌들 덕분에
나는 외할매는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낮 동안 그렇게 잊고 있던 할매가 말똥말똥 떠올랐다.
‘할매는 지금 혼자 있겠다. 태봉 할매가 마실 와서 고마 자고 가마 좋을 긴데….’
무딘 칼 하나가 스르릉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듯 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쓰윽 눈가를 훔치고 한숨을 포옥 내쉬었던가.

하지만 아침이 밝으면 그뿐, 자치기다, 땅따먹기다, 연 날리기다,
나는 사촌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정신없이 놀았다.
자치기는 한 팔 정도 길이에다
굵기가 한 움큼 정도 되는 단단한 몽둥이(큰 자)와
양 끝을 비스듬히 자른, 한 뼘 정도의 길이에다
굵기는 엄지 손가락만한 나무토막(작은 자)이 필요했다.
몇 명씩 편을 갈라 공격과 수비로 나누고
오백 자 내기, 삼백 자 내기 등 한 판의 길이는 합의하여 정했다.
공격수는 마당에 파놓은 잴쑴한 구멍 위에 작은 자를 가로로 걸쳐두고
큰 자로 그 놈을 힘껏 떠서 날린다.
날아오는 작은 자를 수비가 받으면 ‘죽는다.’
받지 못하면 수비수는 떨어진 작은 자를
구멍에 가로로 걸쳐놓은 큰 자를 향해 던진다.
작은 자가 큰 자를 맞히면 역시 ‘죽는다.’
이렇게 공격수가 죽으면 공수가 바뀐다.
맞히지 못하면 이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는데
땅에 떨어져 있는 작은 자의 비스듬한 끝 부분을
큰 자로 톡 쳐서 튀어 오르게 하여
있는 힘껏 큰 자를 휘둘러 작은 자를 맞혀 날려 보내는 것이다.
이때 헛휘두르는 수도 있으므로 세 번까지 휘두를 수 있다.
이렇게 날아오는 작은 자를 수비가 받으면 죽지만
그렇지 않으면 작은 자가 떨어진 자리에서 또 휘둘러
날려 보내고 세 번을 그렇게 한다.
마지막에 작은 자가 떨어진 자리에서 구멍까지의 거리를 어림짐작 해보고
공격수는 “팔십 자”니, “백 자”니 외친다.
수비수는 공격수가 부른 자 수가 그럴 만하다 싶으면
“에라, 묵어라”하거나
터무니없이 많이 불렀다 싶으면
“머시라 카노! 택도 없다. 재보자”하게 된다.
그래 막상 재보니 팔십 자가 넘으면 머쓱해 질 밖에.
“재보자 캐쌌더마는 아나, 콩이다.”
그러나 팔십 자가 안 되면 이번에는
수비수들이 득의양양해 지고 공수가 바뀐다.
“그거 바라, 좀만아. 불러도 엉가이 불러야지.”
이렇게 먹은 자 수를 모아 첨에 정한 자 수에 먼저 도달한 쪽이 이긴다.
이 자치기는 우리 사촌들 몇이 한 패가 되어 다른 애들과 붙었다.
나는 늘 헛손질을 하거나 기껏 날려 보낸 작은 자를
수비수가 받기 좋게 갖다 바치기나 할 뿐이어서
내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애물단지에다 상대편을 도와주는 꼴이었다.
점수를 내는 것은 주로 준이 형이었다.
허리춤을 양손으로 잡고 실룩실룩, 궁둥이가 끼도록
바지를 단단히 치켜 올린 다음
입을 앙다물고 요령껏 작은 자를 떠서 날리면
수비하는 애들 머리 위로 훌쩍 날아갔다.
멀리 날아간 작은 자를 수비수들이 대충 어림짐작으로
되던지지만 큰 자를 맞힐 리야 있나.
준이 형이 침을 퉤퉤 뱉아서 큰 자를 단단히 꼬나 쥐면
나는 마구 신이 났다.
“힝야, 억수로 멀리 치뿌라.”
“옆에 나온나. 맞을라. 요고요고 보내뿐다. 잘 바래이.”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자가 날아가면 같은 편인 우리들은
덩달아 따라 뛰면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배액 자다아~~~!”
달아오른 햇살에 얼었던 땅이 녹아
군데군데 질척거리는 보리밭을 달려가노라면
고무신은 일쑤 벗겨지고 놀란 갈가마귀 떼가 후두두둑 날아올랐다.
자 질을 제대로 했네, 아니네 하는 다툼은 빠질 수가 없었다.
“야 일마, 니, 칠십 너이 다음에 와 또 육십 다섯 이카노?”
“내가 언제? 바로 했다! 차말이다.”
“지랄하지 마라. 다 들었다. 너거도 들었제, 그자?”
애들은 서로 자기편을 들어 재재거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여름 밤 무논 가의 엉머구리 우는 소리 같았다.
그 싸움에 끼지도 못한 어리숙한 애 하나가 곁에서 구경을 하다가
비죽이 흘러내린 누렁 코를 훅 들이마시면
애들은 그 모습에 그만 허리를 꺾으며 웃고
언제, 뭘로 싸웠는지도 잊어버렸다.

연날리기는 좀 더 준비가 필요하고 세련된 놀이였다.
질긴 한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귀한 종이를 놀이에 쓸 수는 없었고
‘돌가리 조오’라 불렀던 비료포대 종이가 가장 좋았다.
재실 뒤에 있던 대밭에서 적당한 대를 잘라 와서는 살대를 마련하여
얼기설기 연을 만들고 반짇고리에서 훔쳐낸 실에는
사금파리를 빻아 풀과 섞어 ‘사를 먹였다.’
‘자세’라고 불렀던 얼레에 사를 먹인 연줄을 두툼하게 감고
종이를 길게 잘라 연 꼬리도 붙인 다음
날리는 중에 행여 꼬리가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서 이어붙일 요량으로 여분의 꼬리며 밥풀도 준비했다.
햇살 잘 드는 동구 밖 논 가운데의 짚동 앞으로 달려 나가면
이미 먼저 온 아이들의 연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연을 맨 처음 띄워 올리는 데는 요령이 필요하다.
어깨 뒤로 연줄을 바투 잡고 냅다 뛰면서 차츰 연줄을 조금씩 느꿔 주면
맞바람을 받은 연은 우쭐우쭐 하늘로 떠오르고
적당히 떠올랐다 싶으면 얼레를 풀어 연줄을 마구 늦추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연줄을 늦추다 보면 연은 그만 비틀비틀
아래로 가라앉기도 하는데
이럴 땐 늦추던 연줄을 멈추고
재빨리 손으로 연줄을 나꿔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연은 다시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
우리 연도 이윽고 까마득히 솟아올라
다른 연들과 비슷한 높이에 다다랐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는 팔랑대고 팽팽한 연줄은
휘영청 곡선을 그리며 연과 이어져 있다.
그때라야 얼레가 겨우 내 손으로 넘겨졌다.
아, 연줄을 당겨보는 손에서 느껴지던
그 묵직한 무게감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탱금아!’ 외치며 얼레를 아래로 확 잡아채면
연은 조금 뒤에 대답이나 하듯이 우쭐한다.
종이를 조그맣게 찢어 가운데 구멍을 내어 연줄에 끼워 놓으면
이 종이가 실을 따라 차츰 연을 향해 다가가는데 우리는 이것을 ‘편지 보낸다’고 했다.
가오리연, 방패연, 모양도 제각각인 연이 예닐곱 개나
까불랑대며 떠 있는 쨍하니 새파란 겨울 하늘.
가끔 비행기가 백묵으로 천천히 선을 긋듯
꼬리에 비행운을 길게 뿜으며 지나가곤 했다.
아이들은 얼레는 땅에 박아 놓은 채
햇살 따뜻한 짚동 사이에 몸을 파묻고
주머니에 넣어 온 고구마 삐득이를 나눠 먹으며 재깔거렸다.
연날리기는 슬슬 연싸움으로 이어졌다. 그 순서는 꼭 이랬다.
이야기도 한 풀 꺾이고 연날리기가 좀 심심해 질 무렵이면
얼레를 쑥 뽑아 대뜸 옆으로 가로질러
몇 발짝 옮기는 놈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번에 연줄이 얽혀 실과 실이 맞닿은 곳이 날카롭게 구부러진다.
“야이 새끼야, 와 이카노? 돌아가마 될 거로, 연줄 끊어진다, 일마!”
“비이라. 나는 저 짝에 가서 날릴 기다.”
“이 자석이요? 니 함 붙으까? 연 나가도 울지 마래이.”
“그래, 붙자! 니 연 나가지 내 연 나갈 줄 아나.”
다른 애들이 제각각 얼레를 뽑아들고 옆으로 비켜서면
연싸움이 시작되었다.
말 타듯이 무릎을 반쯤 구부린 채 반동을 주어가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있는 힘껏 얼레를 감다가
얼레를 세워서 줄을 탁 풀어주면
연은 까마득히 멀어지며 가라앉고, 다시 솟아오르고.
그러기를 몇 번, 드디어 엉겨서 비벼대던 실 하나가 툭 끊어져
연 하나가 긴 꼬리를 흐물거리며 내려앉기 시작한다.
“연 나갔다아~~~!”
연실이 아까워 얼레를 내동댕이치고
보리밭을 가로질러 죽어라 달려가 보지만
연은 바람에 실려 너울너울 가뭇없이 멀어져 갔다.
울지 않겠다던 녀석은 기어이 비죽대며
다시 짚동 앞으로 털래털래 걸어온다.
“그 바라, 일마. 내한테는 안 된다 안 카더나.
내가 어제 사 믹인 거, 니 몰랐지 시푸더라카이. 꼬오시다!”

놀기에도 모자란 짧은 겨울 해가
마당가에 길게 감나무 그림자를 드리울 쯤이면
동네 고샅길에는 저녁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깔린다.
아이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소죽을 끓이거나 마당을 쓸고
혹은 소여물 써는 작두날 아래 짚단을 먹이는 일손을 거들었다.
써억둑, 써억둑 잘려나간 짚은 이내 여물 무더기를 이루고
이걸 삼태기에 담아 커다란 가마솥에 쏟아 넣고
구정물, 등겨, 콩깍지 등과 뒤섞어 소죽을 쑤는 것이다.
날은 어둑해 지는데 밝게 너울대며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노라면
사타구니는 불의 열기가 전해져 가려워졌다.
그리고 모두들 갑자기 각자의 생각을 따라 어디론가 가버린 듯
준이 형도 말이 없었고 나는 또 할매 생각이 났다.
무릎을 세우고 깍지 낀 손등 위에 턱을 얹고서 날름대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외갓집의 그 천정 높던 부엌과
굼뜨게 움직이며 혼자의 끼니를 짓는
할매의 치맛자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아, 참 그리고 ‘스피커’ 이야길 해야겠다.
유년의 나를 난생 처음 상상력의 길로 인도한
그 감미롭던 목소리의 향연을….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때 시골 집집마다
대청마루 기둥이나 시렁에 됫박만한 유선 스피커가
달리기 시작한 게 그 시절이었나 보다.
하루 종일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해가 설핏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 되면
깨금발을 딛고 단 하나 달려있던 스위치를 딸깍 오른쪽으로 돌린다.
‘찌지직’하는 낯선 전자음이 잠깐 들리고 난 후 방송이 흘러나왔다.
따라라라 딴딴딴 따라라라 딴딴딴 따라라라 딴딴따아라아~~~
백조의 호수가 짤막하게 시그널로 깔리고 이어서
“어린이 시간”이라고 다소 과장되고 경쾌하게 발음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 정말이지 천상의 소리가 달리 없었다.
적어도 내가 태어나 그렇게 이쁜 목소리의
표준말을 들어본 것은 단연 처음이었다.
“전국에 계신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기다리는 어린이 시간입니다. 어쩌구저쩌구….”
옆에서 쓰다듬듯 친절하고 감미롭게
귀에 감겨오는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자지러질 지경이 되고
오줌이 마려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린이 연속극, 걸리버 여행기.
동화책 한 권 구경한 적이 없던 나에게
그 낭독 연속극은 거의 충격이었다.
할매들이 나누는 어깨너머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거기 있었다.
내가 훗날 어른이 되어
사람 살아가는 악다구니가 시끌작한 저자 바닥이나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정희성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中)’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해갔을지언정
그 유년의 한 때 내 마음에 뭉게뭉게 스며들던
그 ‘이야기(상상력)’의 추억은 여전히 새롭고, 아릿하고, 유효하다.
그러하므로 나는 스피카에, 걸리버에, 그리고 이름 모르는
성우들에게 크게 빚진 셈이다.

까무룩한 호롱 하나로 밝힌 방은 그 등잔 주위만 둥그렇게 드러날 뿐
나머지 공간 대부분은 부드러운 어둠에 묻혀
사물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심지를 조금 돋우어 불꽃을 키우기라도 하면 문득 화안해 지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물론 그런 느낌의 순간은 이내 멀어진다.
우리는 심지를 돋워 야…밝다, 어쩌구 하면서 시시덕대다가
그을음 난다고 할매한테 지청구를 있는 대로 듣고서야
심지를 도로 낮추곤 했다.
나는 그 호롱 불빛 아래서 처음으로 국민학교 일학년 국어책을 봤다.
나보다 한 살 많던 사촌형의 것이었다.
무슨 조화였던지 며칠 안 되는 짧은 동안에
나는 한글을 뚝딱 깨쳐버렸다.
아마도 몇 살 많던 형들이 더듬더듬 가르쳐 준 덕분도 있었을 테고
또한 외할매와 함께 지낸 그 하고많던 시간 동안
유난히도 ‘이바구책’을 좋아하던 할매의 어깨너머로 스며들이듯이
글자의 문리를 나도 모르게 틔워 놓았던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아이가 서너 살만 되어도 벽에 자모음 표니
알파벳 표니 붙여두고
호들갑을 떨어쌌지만, 그거 다 우습게 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이 얼렁뚱땅 한글 실력은 입학을 하고 난 뒤
마구 빛을 내기도 했으니
선생님이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카드를 만들어 와서 하나씩 꺼내들고
자기 이름이 나오면 크게 읽고서
그 카드를 받아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한데 꽤 많은 아이들이 제 이름이 적힌 카드가 나와도 꿀 먹은 벙어리,
나는 큰 소리로 그 이름을 대신 읽었다.
뒤에 늘어선 엄마들이 놀라 수군대는 소리에 나는 더 신이 났고….
뭐, 여하튼 그땐 그랬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짧았던 큰집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나는 큰아버지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왔다.
재색 모직 두루마기에 중절모 약간 뒤로 젖혀 쓰고
차부가 있던 읍내, 장터 목로에서 차 시간 될 때까지
친구 분과 막걸리를 나눠 마신
큰아버지와 함께 차에 올랐다.
아, 맞다. 그때 시골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사촌 큰누이가
“기집아가 중학 했으면 됐지, 고등은 무신 고등?”하면서
윽박지르던 할매의 뜻을 울음 잡혀가며 기어이 거역한 끝에
부산의 어느 여자 상업학교에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함께 갔었다.
그날 큰아버지는 엿목판을 목에 걸고 차에 오른 장사치에게서 깨엿을 사주었다.
촘촘히 박힌 매끄러운 깨 덕분에 엿은 진득하니 손에 달라붙지도 않고
하염없이 달고 고소했다.
그래서 깨엿은 지금도 나의 ‘훼이버릿’ 간식이다.

(요즘엔 참깨강정은 흔해도 그런 참깨 박힌 엿은 잘 없다.
근년에 큰엄마가 집에서 달인 조청으로 손수 만든 엿을
설에 조카들한테까지 한 무더기씩 나눠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 넘을 한 토막 입에 넣고 아쉬운 대로 부엌을 뒤져
양념으로 준비해둔
통깨 한 찻술을 털어 넣고 우물거려 보았다. 깨엿!이었다.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실실 웃으며 엿을 먹는 나를
애들이 이상한 듯이 바라보는 게 아닌가.
“아빠,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
“응. 죽인다. 니도 함 먹어봐.”
“에이, 싫어. 엿은 싫어. 이빨에 붙어.”
“그게 아니고, 이게 말이야, 깨랑 먹으면 이빨에도 붙지
않는다니까."
“깨도 싫어. 끄꺼러워서 싫단 말야.”
“아, 참 나…, 이게 깨엿이라니까!”
“아, 글쎄 깨엿이 어쨌다구!”
그래…, 깨엿이 뭘 어쨌단 말인가. 결국 혼자서 ‘엿 먹었다.’
그날은 속이 다려서 저녁은 먹지 못했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의당 기억되어야 마땅하지 싶은 큰 사건들이
까마득하게 자취조차 없어 의아한 경우를 만나게 된다.
오히려 그런 일 주변의 사소한 풍경이나 말 한 마디,
혹은 앞뒤 맥락이 흐릿한 토막 난 꿈과 같은 생각의 쪼가리들만
기억의 바탕에 자잘한 무늬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근 이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 나에게 작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왜 그런지 그때의 정경은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할매의 사랑과는 또 다른
엄마, 아버지의 무릎아래, 그 자욱한 사랑의 훈김 안에서
내 유년의 시간을 이어갔을 터이다.
그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자.
다만 가난하고 쓸쓸했으되 내 마음의 빛깔에 지울 수 없는 색을 입힌
저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외갓집의 생활을 접고
역시 가난했으나 당당한 수고로
우리 형제를 먹이고 입히며 재우고 가르친
부모와 형제, 그 다정하고 애틋한 피붙이들 곁으로 돌아와
어떻게 펼쳐져 나갈지 그때로서는 가벼이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멀고도 아득한 인생의 길로 첫걸음을 떼며 걸어 들어갔다는 것!